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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저자 북토크] Between Us & Moments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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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손님들의 테이블 위에서 주인공이었던 와인 병들은 다음 날 빈 병이 되어 버려집니다. 그런데 그 병에는 여전히 예쁜 라벨이 붙어 있습니다. 어라우즈의 희정 님은 매일 아침 혼자 가게를 정리하다 이 라벨에 눈이 갔고, 그냥 버리기엔 아깝다는 마음 하나로 뜨거운 물을 부어 라벨을 한 장씩 뜯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와인 라벨과 손님들의 대화가 짝지어져 한 권의 책 《Between Us & Moments》에 묶였습니다.

희정 님은 서울 남산타운 상가에서 쉐프이자 푸드칼럼니스트인 남편 장준우님과 함께 5년째 와인바 어라우즈(arouz)를 운영합니다. 광고회사에서 오래 일했고, 잠시 회사를 쉬며 체코 프라하에서 2년 가까이 투어 가이드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어라우즈를 꾸리면서 여러 콘텐츠를 기획하고 디렉팅합니다. 이번 북토크의 제목이자 그가 만든 책의 이름은 《Between Us & Moments》로, 손님들과 와인을 나누며 함께한 순간들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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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ouz(어라우즈), Neighborhood Bistro wine & something.

어라우즈는 영어로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자극한다는 뜻입니다. 유럽에 가면 골목마다 사는 집과 가게가 뒤섞인 작은 공간이 있는데, 그런 동네 가게를 한국에 옮겨 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삼각지나 용산 같은 힙한 상권도 생각했지만, 지금의 남산타운 주택가 자리를 골랐습니다.

이곳에는 메뉴판도 와인 리스트도 없습니다. 타파스 오마카세가 제공되며,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너 병의 와인을 희정님이 직접 소개합니다. 손님 앞에 와인 서너 병을 펼쳐 놓고 이건 이런 맛이고 어떤 음식과 어울린다고 설명하면, 손님들은 라벨을 보며 한 병을 고릅니다. 희정님은 매일 바 안쪽에서 라벨을 보며 와인을 고르는 손, 잔을 돌리다 가만히 향을 맡는 표정, 첫 모금 뒤 무언가를 떠올리는 눈빛을 지켜봅니다. 와인을 고르는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경험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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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병에서 시작된 아카이브

매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루틴이 있습니다. 희정님도 아침마다 출근해 가게를 정리하며 루틴이 시작됩니다. 조명 밝기를 맞추고, 마른 그릇을 정리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손님과 첫인사를 준비합니다. 요리는 오너 쉐프인 남편이 맡기 때문에, 요리 외에 자기가 가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분리수거를 하던 중 빈 와인 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쓰임을 다하고 버려질 일만 남은 그 병과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와인바를 운영하고 있는 자신이 겹쳐지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 라벨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물을 부어 라벨을 한 장씩 뜯는 일은 마치 명상 같았습니다. 접착이 남은 라벨은 민음사의 일력 페이지에 펴 붙여 하나씩 상자에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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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과 말이 겹쳐 쌓인 추억

라벨을 모으는 동안, 희정 님은 손님들이 주고 받은 이야기 중에 인상깊은 말도 라벨과 함께 따로 적어 두었습니다. 샴페인 라벨 옆에는 여자친구 생일이라 예약했는데 마침 여자친구의 입사 확정 전화가 왔다며 기뻐했던 손님과 나눈 이야기를 적어두었고, 이탈리아어로 우정을 뜻하는 아미스타(Amista) 라벨에는 '친한 친구들과 오고 싶은 곳,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구랑 올까 생각한다'는 손님의 말을 적어두었습니다. 오래 어라우즈를 찾고 있는 단골들에게도 어라우즈에 대한 추억을 글로 받아두었고, '오래오래 함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당부도 함께 모아두었습니다. 모든 책에서 겹치는 라벨이 하나도 없는데, 어라우즈가 그만큼 다양한 와인을 다룬다는 걸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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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이 된 와인바

아카이빙을 생각하고 아카이빙을 만든 것이 아니었고, 전시를 생각하고 전시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희정님이 하나 둘 쌓아온 와인 라벨 아카이브는 5주년을 맞아 책으로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책은 손님들께 선물로 드리려 했습니다. 책에 들어갈 사진을 위해 촬영을 온 한 포토그래퍼가 라벨 작업을 하나하나 펼쳐 보며 희정님과 대화를 나눴고, 다른 손님들과도 포토그래퍼 님처럼 라벨을 펼쳐보며 대화를 나누고 싶어져 전시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2023년 겨울부터 2025년 여름까지 라벨을 모았고, 책을 엮는 데만 다시 여섯 달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올해 4월 초가 되어 어라우즈에서 나흘 동안 와인 라벨 아카이브 전시를 열었습니다. 열 명 남짓 앉는 긴 바를 전시대로 바꾸고, 라벨이 온전히 떼어지는 과정을 전시에 선보였습니다. 요리하느라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남편 장준우 셰프에게도 뜻깊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아끼던 일력의 뒷면에는 라벨을 붙여, 손님들이 원하는 날짜를 골라 가져가도록 스탬프를 찍어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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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고객들

희정 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와인 라벨 아카이브 북을 상하이 아트북 페어에서 소개한 것입니다. 첫 북페어를 해외에서 경험했기에, 중간에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중국에서 책을 소개하려면 검열 과정을 거쳐야해, 전시할 책을 직접 들고 갈 수 없었습니다. 책이 안 팔리면 무거운 책을 도로 가져와야 한다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페어에서는 와인을 잘 모른다던 한 손님도 책 설명을 듣고 공감해 책을 샀고, 한 시간 뒤 다시 찾아와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 생일 선물로 하겠다'며 한 권을 더 샀습니다. 책에 실린 라벨의 스캔본을 하나씩 골라 가게 하자, 아끼는 다이어리에 그것을 붙이겠다는 손님도 있었습니다. 아직 와인을 마시기엔 어려 보이는 한 친구는 자기가 모으는 사탕 포장지 사진을 보내주었고, 8월에 한국에 오면 어라우즈를 찾아오겠다는 약속도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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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가진 경험에 형태를 만들기

이미 가진 경험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손님과 나눈 대화, 희정님이 하나 하나 신경쓴 경험이 와인 라벨과 기록이란 형태로 남고, 그것을 책으로, 다시 전시로, 상하이 아트북 페어로, 그리고 오늘의 북토크로 이어졌습니다. 희정님은 매일의 구체적인 경험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발견했고, 모아 두었고,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연결했고, 사라지지 않도록 책으로 남겼습니다. 다음 스텝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이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희정님은 회색 책 첫 장에, 어라우즈 살롱에서 함께 읽은 박지영 작가의 소설 《고독사 워크숍》 한 구절을 넣었습니다. '매일매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변화를 조금씩 주면서, 그 작은 변화가 웃음을 만드는 기적.' 그리고 최근 읽은 홍진기 작가의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출현: 사고외주》 한 구절로 이야기를 맺었습니다. '진짜 실력은 매끄러운 결과물이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동안 남긴 거칠고 투박한 흔적에서 만들어집니다. 한 사람의 내면은 결국 그가 통과한 시간의 모양을 닮습니다.' 

Q. 라벨만 보고 그 와인의 맛을 알 수 있나요?

한 멤버가, 자신은 라벨을 봐도 맛이 잘 상상되지 않는다며 물었습니다. 희정 님은 와인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설명했습니다. 전형적인 방식으로 만드는 와인(컨벤셔널 와인)은 품종과 산지 같은 정보가 라벨에 적혀 있어 취향을 가늠하기 좋지만, 와인 만드는 사람이 자기 개성을 살려 만드는 내추럴 와인은 앞 라벨만으로는 알기 어렵고 뒷면 라벨을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라벨을 보고 맛을 상상하는 일은 와인을 어느 정도 마셔 본 뒤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와인 라벨은 마치 책 표지처럼 와인을 미리 보여주는 얼굴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마셔 본 와인을 사진으로 찍어 두고 AI에게 취향을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권했습니다.

Q. 형태가 없는 무형의 서비스는 어떻게 유형으로 남길 수 있을까요?

무형의 서비스를 하는 사람은 남길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무언가를 만들어 축적해야 할텐데, 책 한 권처럼 큰 단위가 아니라 더 작은 단위가 무엇일지 계속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희정 님은 무언가를 모은다면 반드시 형태가 생겨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Q.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다 흐름이 끊기면 어떻게 돌아오나요?

라벨을 떼려면 뜨거운 물을 부어야 해서, 병이 차가운 한겨울이나 가만히 있어도 더운 한여름에는 라벨을 떼는 작업을 하기 어렵습니다. 봄가을에 주로 라벨을 떼는 작업을 하는데, 처음에는 예쁜 라벨이 잘 안 떼어지면 뜨거운 물을 두세 번씩 여러번 부어 가며 매달렸지만, 지금은 안 되면 미련 없이 다음 병으로 옮깁니다. 희정님은 지나간 것이나 안 되는 것에 연연하지 말자는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전날 뜻깊은 대화를 나눈 병을 찾아 다시 라벨을 뜯기 시작하면, 그날의 대화가 떠올라 저절로 루틴을 다시 되찾게 된다고 합니다. 대화와 라벨을 연결지어 두었기 때문에, 루틴을 잠시 멈추더라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생각이 연결될 때, 

성장은 더 멀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