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개월 동안 일어난 거시적 이슈를 정치, 경제, 사회, 기술이라는 네 개의 관점으로 한 자리에서 확인했습니다. PEST 브리핑은 매 시즌 첫 달에 열리는 세미나로,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편식 없이 뉴스를 소비할 수 있도록 지난 3개월간 주요 정치·경제·사회·기술 이슈를 선정해 멤버들에게 전합니다.
P 정치
강원님은 '민주주의의 연극은 끝났다'라는 제목으로 2026년 지방선거를 설명했습니다. 왜 여론조사는 빗나갔고, 20대와 30대는 왜 남녀로 갈라졌으며, 투표용지가 모자랐던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차례로 풀어갔습니다.
민주당 압승, 그러나 서울을 내준 선거
결론부터 보면 민주당의 압승이었습니다. 16개 광역단체장 가운데 12곳에서 이기며 2022년 지방선거 결과를 뒤집었습니다. 다만 선거 전 더 큰 승리가 점쳐졌던 것에 비하면 기대만큼 크게 이긴 선거는 아니었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서울을 내줬습니다. 새벽 개표 막판부터 추격이 시작돼 아침 7시 16분께 역전이 일어났고, 오세훈 후보가 서울시장이 되었습니다. 서울이 전국의 축소판인 만큼, 누가 이기고 졌다고 단정하기 애매한 선거였다고 강원님은 짚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여론조사의 실패입니다. 서울도 부산도 전북도 경남도지사도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조사기관들은 샤이 보수의 응답 회피로 설명하지만, 강원님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봤습니다. 기존 조사가 포착하지 못한 새로운 투표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투표 용지 부족 사태
이번 선거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투표 용지 부족 사태였습니다. 6월 3일 선거 당일 전국 91개 투표소에서 용지가 모자랐고, 그중 26곳은 투표가 잠시 멈췄습니다. 서울이 42곳으로 가장 많았고 송파구에만 20곳이 몰렸습니다. 중앙선관위가 지난해 12월 본투표 용지 인쇄량 하한을 선거인 수의 60%에서 50%로 낮춘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송파 잠실7동 투표소에서는 투표함을 개표소로 옮기지 못하게 막는 농성이 시작됐고, 시위대가 개표소인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황교안·전한길 씨까지 등장했습니다. 봉쇄가 길어지자 핸드볼경기장에 장비를 둔 펜싱 국가대표팀이 칼을 꺼내지 못해 남의 칼을 빌려 아시아선수권대회 출국길에 오르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시위의 성격이 변해간 과정입니다. 주말에는 유아차를 끈 30대 부부와 대학생이 몰리며 부정선거가 아닌 참정권 시위로 색이 바뀌었다가, 평일이 되자 목사들의 대중 강연이 열리며 음모론이 퍼졌습니다.
정당에서 인물로: 청중 민주주의와 새로운 정체성
강원님은 이 변화를 정치학자 버나드 마넹의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마넹은 정당 민주주의 이후의 지금을 《선거는 민주적인가》에서 '청중 민주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는 정당이 기본소득이나 무상급식 같은 의제로 지지자와 비지지자를 갈랐다면, 지금은 인물을 중심으로 갈립니다. 유권자는 정당의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을 대변하는 이미지에 표를 던지는 팬이 되어갑니다.
이번 선거 행정의 붕괴에서 또 한 번 신뢰도가 무너지자 중립적 배경마저 사라졌습니다. 모든 신뢰가 깨진 자리에서 음모론은 차라리 안심을 줍니다. 악의 세력이 세상을 조종한다고 믿으면, 적어도 세상이 누군가의 계획대로 굴러간다는 위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강원님은 무너진 질서, 유튜브 중심의 청중 민주주의, 불안을 방어하는 나르시시즘적 정체성, 이 셋이 결합해 새로운 유권자 정체성이 태어나고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우리가 믿던 진보와 보수라는 정당 중심 민주주의의 연극은 끝났고 새로운 정치가 태어나고 있다는 말로 정치 세션을 맺었습니다.
E 경제
경제 세션은 며칠 전 상장한 스페이스X를 다뤘습니다. 발표자는 기관 투자자의 시선으로, 역대 최대 IPO라는 화려한 첫날 뒤에 어떤 질문들이 숨어 있는지를 따라갔습니다.
100조 원을 조달한 역대 최대 IPO
스페이스X는 6월 12일 상장했습니다. 조달 규모는 약 750억 달러, 우리 돈으로 100조 원에 이르는 역대 최대 IPO였습니다. 첫날 19% 오르며 글로벌 시가총액 상위 10위권에 곧바로 진입했습니다. 이번 거래로 직원 가운데 백만장자가 4천 명가량 나왔고, 현장에서 용접하던 직원도 수십억을 벌었으며, 1500억 원 규모의 주식을 가진 사람도 4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우주 로켓 회사라는 이미지와 달리, 1순위는 AI 컴퓨팅 인프라 구축이었습니다. 데이터센터와 GPU에 돈을 쓰고, 차세대 로켓 스타십과 고사양 스타링크 위성 개발이 뒤를 잇습니다. 그런데 100조 원을 조달한 지 2주도 안 돼 200억 달러, 약 30조 원 규모의 회사채를 추가로 발행하겠다고 밝히면서 시장은 의아해했고, 주가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머스크가 85%를 쥔 지배구조
지배구조도 화두였습니다. 주식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이번에 공모된 클래스 A는 주당 1표, 머스크와 초기 창업 멤버가 가진 클래스 B는 주당 10표의 차등의결권을 갖습니다. 머스크는 클래스 A 12.3%에 더해 클래스 B 대부분을 보유해 의결권 기준 85%를 지배합니다. 사실상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사내 이사는 클래스 B 주주만 선임할 수 있어 이사회도 견제 장치로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발표자는 기관 투자자 입장에서 이 점을 위험 요소로 봤습니다. 다른 주주가 견제할 수 없는 장치를 만들어 놓고 상장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성과 보상 패키지도 독특합니다. 시가총액 7.5조 달러 달성과 화성에 100만 명을 이주시키는 목표를 이루면 지분 약 8%를 추가로 받는 구조인데,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창업자가 그리는 먼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보상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세 개의 사업부: 발사체, 스타링크, AI
스페이스X는 크게 세 사업부로 움직입니다. 첫째는 발사체 서비스입니다. 작년 한 해 165회를 발사했으니 2~3일에 한 번꼴로 로켓을 쏜 셈이고, 대부분 성공했습니다. 보통 제조 원가의 60~70%를 차지하는 로켓을 버리지 않고 재사용하는 것이 이 회사의 차별점 입니다. 한 로켓을 20회 이상 재사용하면서 발사 원가를 크게 낮췄습니다. 이번 자금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차세대 모델은 100톤 이상을 실을 수 있어, 누리호 70번 쏠 무게를 한 번에 올립니다. 엔진도 1단과 2단을 모두 재사용해 발사 비용을 99% 이상 줄이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는 캐시카우인 스타링크입니다. 작년 매출 114억 달러, 이익 44억 달러대에 영업이익률이 40%에 이릅니다. 저궤도에 통신 위성을 띄워 빠른 인터넷을 제공하는 사업으로, 이미 9600개가량의 위성이 160여 개국에서 돌고 있습니다. 발사 원가가 낮아질수록 위성을 더 자주 쏠 수 있어 발사체와 스타링크가 서로를 밀어줍니다. 시장 규모는 1.6조 달러로 추정되는데 침투율이 1%에 불과해, 독점에 가까운 위치에서 앞으로도 잘 벌 것이라는 기대가 큽니다.
셋째는 올해 초 xAI와 합병하며 생긴 AI 사업부입니다. 다만 이쪽이 주가 하락의 큰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록의 성능에 의구심이 있고, 1분기에만 77억 달러를 투자할 만큼 돈을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앤트로픽이 컴퓨팅이 모자라 스페이스X의 데이터센터를 월 12.5억 달러, 약 1.5조 원에 임대하기로 했고 구글도 월 9억 달러 규모로 계약하면서, 차라리 데이터센터 장사가 더 남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대체 불가 기업, 그러나 남는 질문들
미국과 중국이 AI와 우주항공을 두고 패권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스페이스X는 미국 정부도 대체하기 어려운 기업이 됐습니다. 투자자들이 좋아하는 독점적·대체 불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입니다. 다만 발표자는 환호 뒤의 숫자도 함께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24년 흑자 전환했다가 25년 다시 적자로 돌아섰고, 26년 1분기에 이미 약 43억 달러 적자를 냈습니다. 스타링크와 발사체가 버는 돈을 AI가 다 써버리는 구도라, 적자를 견디며 성장하는 과정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거래되는 물량이 4% 정도뿐이라 변동성이 크고, 연말에 오래 기다린 투자자들의 지분 30%대가 풀릴 예정이어서 매도 대기 물량이 상당하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는 당부로 경제 세션을 마쳤습니다.

S 사회
사회 세션은 외국인 관광 데이터로 한국 소비 트렌드를 읽었습니다. 이슬님은 길을 걷다 외국인을 자주 마주치는 요즘의 감각을 데이터로 옮겨, 이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업에 적용할 수 있을지를 짚었습니다.
외국인 매출이 매장을 채우다
먼저 숫자입니다. 무신사는 주요 매장에서 매출의 44%가량이 외국인 고객에게서 나오고, 올리브영은 작년 전체 매출 약 5조 8천억 원을 기록했는데 그중 외국인 매출이 1조 원을 넘었고, 명동 타운점은 외국인 비중이 95%에 이릅니다. 백화점 3사의 1분기 외국인 매출도 90% 넘게 급증했고, 3분기 안에 각 백화점에서 외국인 매출 1조 원, 매출 비중 10% 돌파가 점쳐집니다. 무신사와 올리브영이 외국인 마케팅 정규직을 채용하는 것은, 이것이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관광공사는 2028년 외국 관광객 3천만 명 시대를 목표로 잡았는데, 올해만 2300만 명을 거뜬히 넘길 것으로 보여 조기 달성 가능성이 큽니다. 1분기 방한 관광은 전년 대비 23% 늘었고, 지방 공항 입국도 50%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코리아가 뜨는 네 가지 이유
이슬님은 이 흐름을 만든 요인을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는 원화 약세입니다. 가격 경쟁력이 오르면서 숙박·식사·쇼핑 부담이 줄었고, 일본과 대만에게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매력적인 가성비 선진국이 됐습니다. 둘째는 방문 이유가 많아진 점입니다. 3월 BTS 공연은 관객의 45%가 외국인이었고, 응답자의 74%가 BTS를 한국 방문의 주된 목적으로 꼽았습니다. 콘서트와 팬미팅, 팝업스토어가 그대로 관광 상품이 되는 K컬처가 사람들을 불러들입니다.
셋째는 SNS 기반의 라이프스타일 소비입니다. 한국에서의 일상을 관광 콘텐츠로 만들고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싶어 하는 욕구가, 한국에서 돈을 쓰게 만드는 힘이 됐습니다. 넷째는 정부의 노력입니다. 단체 관광객 유치에서 개별 관광객 수요로 정책의 방향을 틀었고, 항공 노선과 크루즈 같은 교통 인프라가 꾸준히 개선되며 수요를 키웠습니다.
관광 트렌드 듀얼리즘
한국관광공사가 정리한 트렌드 키워드를 따라가며, 이슬님은 지금의 관광이 쇼핑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줬습니다. AI가 동선을 설계하지만 실제 구매는 피부과나 올리브영 같은 로컬 공간의 경험으로 완성되고, 사람들은 한국인처럼 살아보고 싶어 합니다. 편의점에서 바닐라라테를 사고 라면을 먹는 일상까지 따라 하는 것입니다. 경복궁 같은 랜드마크보다 로컬 브랜드와 지역 상권을 찾고, 서울에 머물지 않고 부산·제주·여수로 관광이 전국으로 퍼져나갑니다.
소비도 양극화됩니다. 좋은 호텔에 머물며 다이소에서 장을 보고, 럭셔리 쇼핑과 피부 시술을 동시에 즐기는 식입니다. 가격이 아니라 취향으로 여행을 결정하고, 무엇을 사느냐보다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더 따집니다. 그 결과 외국인 관광객을 하나의 집단으로 규정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이슬님의 회사 성수 매장은 외국인 비중이 70%인데, 새벽부터 줄을 서는 이유가 제품이 아니라 피부 스캔과 퍼스널 컬러 진단이라는 경험 자체였습니다.
부산이 서울을 앞선 이유, 그리고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
야놀자 리서치가 중국 관광객이 경험한 8개 도시를 비교했더니, 부산이 가장 높은 평점을 받았고 서울은 5위에 머물렀습니다. 서울은 강력한 방문 동기를 갖고 있지만 쇼핑이 구매 중심이라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낮았습니다. 이제는 유치 경쟁을 지나 체류 경쟁, 재방문 경쟁을 고민할 단계라는 진단입니다. 부산은 해양·음식·엔터테인먼트에서 높은 만족을 얻었지만, 다시 오게 만드는 동인을 더 키워야 합니다. 감천문화마을이나 영화의 도시 같은 자산을 꾸준히 스토리텔링하는 것이 부산의 경쟁력이 될 수 있고, 서울과 부산은 경쟁보다 상호 보완으로 함께 가는 편이 낫다는 의견입니다.
레딧 데이터에서는 불편함도 살폈습니다. 가장 큰 불만은 가입 인증이었습니다. 인프라 강국이라는 한국에서 외국인은 결제 수단, 관광 정보, 교통에서 역설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의외였던 것은 태도와 호스피탈리티 문제입니다. 도움을 청했을 때 친절하게 응대받지 못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만족도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이슬님은 이를 '관광객은 시설보다 사람을 기억한다'는 한마디로 정리했습니다. 관광객은 한국을 보는 것보다 살아보기를 원하고, 우리의 생활 문화가 곧 관광 콘텐츠가 되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국가 단위가 아니라 관심사 단위로 다시 정렬해, 체류의 깊이와 경험의 밀도를 어떻게 높일지가 다음 과제라는 질문으로 사회 세션을 맺었습니다.
T 기술
기술 세션은 AI가 반도체와 로봇이라는 가장 까다로운 현장에 어떻게 들어가고 있는지를 다뤘습니다.
AI는 반도체를 어떻게 설계하고, 할루시네이션은 어떻게 잡나
반도체 설계에는 이미 AI가 들어와 있습니다. 칩을 그릴 때 쓰는 전문 설계 프로그램(EDA)에 AI를 결합해 설계 시간을 줄이고 전력·성능·면적을 자동으로 최적화하며, 칩의 동작을 코드로 적는 RTL 단계에서도 시나리오 생성과 코드 리뷰에 AI를 씁니다.
발표자는 그 해법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는데, 다른 업종에도 참고가 될 내용이었습니다. 첫째, AI는 후보안만 제안하고 최종 결정은 엔지니어가 단계마다 확인합니다. 이메일 초안을 AI에게 받되 판단은 사람이 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칩의 경로가 겹치는 식의 물리 법칙 위반을 단계마다 걸러냅니다. 셋째, 배선 최적화처럼 오래 걸리는 일은 AI가, 새 아키텍처나 안전 판단은 사람이 맡습니다. 넷째, 성공 사례를 강화학습으로 익힙니다. 다섯째, 설계 문서를 학습한 검색형 AI(RAG)에 단계별로 물으면 오류가 크게 줄어듭니다.

피지컬 AI라는 새 전장
후반부 주제는 피지컬 AI, 곧 현실 세계에 물리적 영향을 미치는 AI였습니다. 한 업계 집계에 따르면 2025년 글로벌 투자가 전년 대비 74% 늘었고, 전체 벤처캐피털 투자의 10%가량이 이쪽으로 향했습니다. 휴머노이드 시장은 2035년까지 여러 배로 커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미국은 플랫폼과 모델로 리더십을 쥐려 합니다. NVIDIA의 아이작심·코스모스 같은 로봇 제어 플랫폼을 표준으로 만들고, 그 위에서 테슬라 옵티머스와 피겨 AI, 로봇 제어 파운데이션 모델을 만드는 피지컬 인텔리전스가 움직입니다. 하드웨어 몸체만 있고 소프트웨어가 없는 회사는 이 모델을 가져다 쓸 수밖에 없는 생태계를 짜는 전략입니다.

미국·중국·한국의 로봇 삼국지
중국은 다른 길을 갑니다. 대량 생산과 표준화를 앞세우고 국가가 전방위로 지원합니다. 로봇 스타트업이면 일정 금액에 숙소까지 대고, 학교가 추천한 젊은 연구자에게 정부가 계속 투자를 합니다. 그 결과 산업 현장에는 애지봇, 연구 현장에는 유니트리가 많이 쓰이고, 로봇 손 점유율 80%의 링커봇, 하드웨어·AI 모델·데이터를 다 갖춘 갤봇도 나왔습니다. 갤봇은 다리가 없는데, 걷기보다 일하기가 먼저라며 현장에서 옮기고 나르는 일로 매출을 빠르게 확보합니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이 오픈소스로 중국 소스를 가져다 쓸 만큼, 피지컬 AI에서 중국의 추진력이 강하다는 평가였습니다.
한국의 강점은 제조에 있습니다. 세계 1위 제조 공장이 많고, 메모리·반도체 생태계와 현장의 컨피덴셜 데이터를 갖고 있습니다. 휴보를 만든 레인보우 로보틱스, 매출의 98%가 관절을 움직이는 동력 장치인 액츄에이터에서 나오는 로보티즈가 하드웨어를 받칩니다. 로보티즈는 휴머노이드가 만드는 족족 팔리자 하던 협업을 멈출 만큼 시장이 달아올랐습니다. 조선소에서 사람이 기어올라 하던 위험한 용접을 거미처럼 기어오르는 로봇으로 대신하는 디든로보틱스도 소개됐습니다. 발표자의 회사는 현장 데이터를 가진 대기업과 솔루션을 가진 스타트업을 잇는 작업을 올해 하반기부터 시작합니다.
이병한 작가의 3부작과 한국의 기회
발표자는 다른백년의 이병한 작가가 쓴 《아메리카 탐문》, 《테크노-차이나 탐문》, 《대한민국 탐문》 3부작으로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로 성공했지만, 기술을 밀어붙일 때는 중국식 효율을 부러워합니다. 반면, 중국은 기술과 청년 친화적 환경을 갖췄지만, 문화혁명으로 지식인 기반이 무너진 탓에 소프트 파워가 약하단 단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한국은 우수한 제조 기반과 IT 인프라,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국민성,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은 역사가 만든 긍정적 소프트파워를 함께 가졌습니다. 디지털 문명에 맞는 거버넌스를 한국이 앞서 만들 기회라는 것이 이병한 작가의 3부작 결론입니다. 피지컬 AI는 전 세계적으로 막 떠오른 분야라 참고할 선진 사례가 없습니다. 늘 미국·유럽의 레퍼런스를 찾던 컨설팅이 통하지 않는 만큼, 한국이 글로벌 표준이 될 비즈니스 모델을 먼저 만들지 않을까란 가설로 기술 세션을 맺었습니다.
지난 3개월 동안 일어난 거시적 이슈를 정치, 경제, 사회, 기술이라는 네 개의 관점으로 한 자리에서 확인했습니다. PEST 브리핑은 매 시즌 첫 달에 열리는 세미나로,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편식 없이 뉴스를 소비할 수 있도록 지난 3개월간 주요 정치·경제·사회·기술 이슈를 선정해 멤버들에게 전합니다.
P 정치
강원님은 '민주주의의 연극은 끝났다'라는 제목으로 2026년 지방선거를 설명했습니다. 왜 여론조사는 빗나갔고, 20대와 30대는 왜 남녀로 갈라졌으며, 투표용지가 모자랐던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차례로 풀어갔습니다.
민주당 압승, 그러나 서울을 내준 선거
결론부터 보면 민주당의 압승이었습니다. 16개 광역단체장 가운데 12곳에서 이기며 2022년 지방선거 결과를 뒤집었습니다. 다만 선거 전 더 큰 승리가 점쳐졌던 것에 비하면 기대만큼 크게 이긴 선거는 아니었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서울을 내줬습니다. 새벽 개표 막판부터 추격이 시작돼 아침 7시 16분께 역전이 일어났고, 오세훈 후보가 서울시장이 되었습니다. 서울이 전국의 축소판인 만큼, 누가 이기고 졌다고 단정하기 애매한 선거였다고 강원님은 짚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여론조사의 실패입니다. 서울도 부산도 전북도 경남도지사도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조사기관들은 샤이 보수의 응답 회피로 설명하지만, 강원님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봤습니다. 기존 조사가 포착하지 못한 새로운 투표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투표 용지 부족 사태
이번 선거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투표 용지 부족 사태였습니다. 6월 3일 선거 당일 전국 91개 투표소에서 용지가 모자랐고, 그중 26곳은 투표가 잠시 멈췄습니다. 서울이 42곳으로 가장 많았고 송파구에만 20곳이 몰렸습니다. 중앙선관위가 지난해 12월 본투표 용지 인쇄량 하한을 선거인 수의 60%에서 50%로 낮춘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송파 잠실7동 투표소에서는 투표함을 개표소로 옮기지 못하게 막는 농성이 시작됐고, 시위대가 개표소인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황교안·전한길 씨까지 등장했습니다. 봉쇄가 길어지자 핸드볼경기장에 장비를 둔 펜싱 국가대표팀이 칼을 꺼내지 못해 남의 칼을 빌려 아시아선수권대회 출국길에 오르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시위의 성격이 변해간 과정입니다. 주말에는 유아차를 끈 30대 부부와 대학생이 몰리며 부정선거가 아닌 참정권 시위로 색이 바뀌었다가, 평일이 되자 목사들의 대중 강연이 열리며 음모론이 퍼졌습니다.
정당에서 인물로: 청중 민주주의와 새로운 정체성
강원님은 이 변화를 정치학자 버나드 마넹의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마넹은 정당 민주주의 이후의 지금을 《선거는 민주적인가》에서 '청중 민주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는 정당이 기본소득이나 무상급식 같은 의제로 지지자와 비지지자를 갈랐다면, 지금은 인물을 중심으로 갈립니다. 유권자는 정당의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을 대변하는 이미지에 표를 던지는 팬이 되어갑니다.
이번 선거 행정의 붕괴에서 또 한 번 신뢰도가 무너지자 중립적 배경마저 사라졌습니다. 모든 신뢰가 깨진 자리에서 음모론은 차라리 안심을 줍니다. 악의 세력이 세상을 조종한다고 믿으면, 적어도 세상이 누군가의 계획대로 굴러간다는 위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강원님은 무너진 질서, 유튜브 중심의 청중 민주주의, 불안을 방어하는 나르시시즘적 정체성, 이 셋이 결합해 새로운 유권자 정체성이 태어나고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우리가 믿던 진보와 보수라는 정당 중심 민주주의의 연극은 끝났고 새로운 정치가 태어나고 있다는 말로 정치 세션을 맺었습니다.
E 경제
경제 세션은 며칠 전 상장한 스페이스X를 다뤘습니다. 발표자는 기관 투자자의 시선으로, 역대 최대 IPO라는 화려한 첫날 뒤에 어떤 질문들이 숨어 있는지를 따라갔습니다.
100조 원을 조달한 역대 최대 IPO
스페이스X는 6월 12일 상장했습니다. 조달 규모는 약 750억 달러, 우리 돈으로 100조 원에 이르는 역대 최대 IPO였습니다. 첫날 19% 오르며 글로벌 시가총액 상위 10위권에 곧바로 진입했습니다. 이번 거래로 직원 가운데 백만장자가 4천 명가량 나왔고, 현장에서 용접하던 직원도 수십억을 벌었으며, 1500억 원 규모의 주식을 가진 사람도 4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우주 로켓 회사라는 이미지와 달리, 1순위는 AI 컴퓨팅 인프라 구축이었습니다. 데이터센터와 GPU에 돈을 쓰고, 차세대 로켓 스타십과 고사양 스타링크 위성 개발이 뒤를 잇습니다. 그런데 100조 원을 조달한 지 2주도 안 돼 200억 달러, 약 30조 원 규모의 회사채를 추가로 발행하겠다고 밝히면서 시장은 의아해했고, 주가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머스크가 85%를 쥔 지배구조
지배구조도 화두였습니다. 주식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이번에 공모된 클래스 A는 주당 1표, 머스크와 초기 창업 멤버가 가진 클래스 B는 주당 10표의 차등의결권을 갖습니다. 머스크는 클래스 A 12.3%에 더해 클래스 B 대부분을 보유해 의결권 기준 85%를 지배합니다. 사실상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사내 이사는 클래스 B 주주만 선임할 수 있어 이사회도 견제 장치로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발표자는 기관 투자자 입장에서 이 점을 위험 요소로 봤습니다. 다른 주주가 견제할 수 없는 장치를 만들어 놓고 상장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성과 보상 패키지도 독특합니다. 시가총액 7.5조 달러 달성과 화성에 100만 명을 이주시키는 목표를 이루면 지분 약 8%를 추가로 받는 구조인데,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창업자가 그리는 먼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보상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세 개의 사업부: 발사체, 스타링크, AI
스페이스X는 크게 세 사업부로 움직입니다. 첫째는 발사체 서비스입니다. 작년 한 해 165회를 발사했으니 2~3일에 한 번꼴로 로켓을 쏜 셈이고, 대부분 성공했습니다. 보통 제조 원가의 60~70%를 차지하는 로켓을 버리지 않고 재사용하는 것이 이 회사의 차별점 입니다. 한 로켓을 20회 이상 재사용하면서 발사 원가를 크게 낮췄습니다. 이번 자금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차세대 모델은 100톤 이상을 실을 수 있어, 누리호 70번 쏠 무게를 한 번에 올립니다. 엔진도 1단과 2단을 모두 재사용해 발사 비용을 99% 이상 줄이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는 캐시카우인 스타링크입니다. 작년 매출 114억 달러, 이익 44억 달러대에 영업이익률이 40%에 이릅니다. 저궤도에 통신 위성을 띄워 빠른 인터넷을 제공하는 사업으로, 이미 9600개가량의 위성이 160여 개국에서 돌고 있습니다. 발사 원가가 낮아질수록 위성을 더 자주 쏠 수 있어 발사체와 스타링크가 서로를 밀어줍니다. 시장 규모는 1.6조 달러로 추정되는데 침투율이 1%에 불과해, 독점에 가까운 위치에서 앞으로도 잘 벌 것이라는 기대가 큽니다.
셋째는 올해 초 xAI와 합병하며 생긴 AI 사업부입니다. 다만 이쪽이 주가 하락의 큰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록의 성능에 의구심이 있고, 1분기에만 77억 달러를 투자할 만큼 돈을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앤트로픽이 컴퓨팅이 모자라 스페이스X의 데이터센터를 월 12.5억 달러, 약 1.5조 원에 임대하기로 했고 구글도 월 9억 달러 규모로 계약하면서, 차라리 데이터센터 장사가 더 남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대체 불가 기업, 그러나 남는 질문들
미국과 중국이 AI와 우주항공을 두고 패권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스페이스X는 미국 정부도 대체하기 어려운 기업이 됐습니다. 투자자들이 좋아하는 독점적·대체 불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입니다. 다만 발표자는 환호 뒤의 숫자도 함께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24년 흑자 전환했다가 25년 다시 적자로 돌아섰고, 26년 1분기에 이미 약 43억 달러 적자를 냈습니다. 스타링크와 발사체가 버는 돈을 AI가 다 써버리는 구도라, 적자를 견디며 성장하는 과정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거래되는 물량이 4% 정도뿐이라 변동성이 크고, 연말에 오래 기다린 투자자들의 지분 30%대가 풀릴 예정이어서 매도 대기 물량이 상당하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는 당부로 경제 세션을 마쳤습니다.
S 사회
사회 세션은 외국인 관광 데이터로 한국 소비 트렌드를 읽었습니다. 이슬님은 길을 걷다 외국인을 자주 마주치는 요즘의 감각을 데이터로 옮겨, 이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업에 적용할 수 있을지를 짚었습니다.
외국인 매출이 매장을 채우다
먼저 숫자입니다. 무신사는 주요 매장에서 매출의 44%가량이 외국인 고객에게서 나오고, 올리브영은 작년 전체 매출 약 5조 8천억 원을 기록했는데 그중 외국인 매출이 1조 원을 넘었고, 명동 타운점은 외국인 비중이 95%에 이릅니다. 백화점 3사의 1분기 외국인 매출도 90% 넘게 급증했고, 3분기 안에 각 백화점에서 외국인 매출 1조 원, 매출 비중 10% 돌파가 점쳐집니다. 무신사와 올리브영이 외국인 마케팅 정규직을 채용하는 것은, 이것이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관광공사는 2028년 외국 관광객 3천만 명 시대를 목표로 잡았는데, 올해만 2300만 명을 거뜬히 넘길 것으로 보여 조기 달성 가능성이 큽니다. 1분기 방한 관광은 전년 대비 23% 늘었고, 지방 공항 입국도 50%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코리아가 뜨는 네 가지 이유
이슬님은 이 흐름을 만든 요인을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는 원화 약세입니다. 가격 경쟁력이 오르면서 숙박·식사·쇼핑 부담이 줄었고, 일본과 대만에게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매력적인 가성비 선진국이 됐습니다. 둘째는 방문 이유가 많아진 점입니다. 3월 BTS 공연은 관객의 45%가 외국인이었고, 응답자의 74%가 BTS를 한국 방문의 주된 목적으로 꼽았습니다. 콘서트와 팬미팅, 팝업스토어가 그대로 관광 상품이 되는 K컬처가 사람들을 불러들입니다.
셋째는 SNS 기반의 라이프스타일 소비입니다. 한국에서의 일상을 관광 콘텐츠로 만들고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싶어 하는 욕구가, 한국에서 돈을 쓰게 만드는 힘이 됐습니다. 넷째는 정부의 노력입니다. 단체 관광객 유치에서 개별 관광객 수요로 정책의 방향을 틀었고, 항공 노선과 크루즈 같은 교통 인프라가 꾸준히 개선되며 수요를 키웠습니다.
관광 트렌드 듀얼리즘
한국관광공사가 정리한 트렌드 키워드를 따라가며, 이슬님은 지금의 관광이 쇼핑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줬습니다. AI가 동선을 설계하지만 실제 구매는 피부과나 올리브영 같은 로컬 공간의 경험으로 완성되고, 사람들은 한국인처럼 살아보고 싶어 합니다. 편의점에서 바닐라라테를 사고 라면을 먹는 일상까지 따라 하는 것입니다. 경복궁 같은 랜드마크보다 로컬 브랜드와 지역 상권을 찾고, 서울에 머물지 않고 부산·제주·여수로 관광이 전국으로 퍼져나갑니다.
소비도 양극화됩니다. 좋은 호텔에 머물며 다이소에서 장을 보고, 럭셔리 쇼핑과 피부 시술을 동시에 즐기는 식입니다. 가격이 아니라 취향으로 여행을 결정하고, 무엇을 사느냐보다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더 따집니다. 그 결과 외국인 관광객을 하나의 집단으로 규정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이슬님의 회사 성수 매장은 외국인 비중이 70%인데, 새벽부터 줄을 서는 이유가 제품이 아니라 피부 스캔과 퍼스널 컬러 진단이라는 경험 자체였습니다.
부산이 서울을 앞선 이유, 그리고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
야놀자 리서치가 중국 관광객이 경험한 8개 도시를 비교했더니, 부산이 가장 높은 평점을 받았고 서울은 5위에 머물렀습니다. 서울은 강력한 방문 동기를 갖고 있지만 쇼핑이 구매 중심이라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낮았습니다. 이제는 유치 경쟁을 지나 체류 경쟁, 재방문 경쟁을 고민할 단계라는 진단입니다. 부산은 해양·음식·엔터테인먼트에서 높은 만족을 얻었지만, 다시 오게 만드는 동인을 더 키워야 합니다. 감천문화마을이나 영화의 도시 같은 자산을 꾸준히 스토리텔링하는 것이 부산의 경쟁력이 될 수 있고, 서울과 부산은 경쟁보다 상호 보완으로 함께 가는 편이 낫다는 의견입니다.
레딧 데이터에서는 불편함도 살폈습니다. 가장 큰 불만은 가입 인증이었습니다. 인프라 강국이라는 한국에서 외국인은 결제 수단, 관광 정보, 교통에서 역설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의외였던 것은 태도와 호스피탈리티 문제입니다. 도움을 청했을 때 친절하게 응대받지 못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만족도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이슬님은 이를 '관광객은 시설보다 사람을 기억한다'는 한마디로 정리했습니다. 관광객은 한국을 보는 것보다 살아보기를 원하고, 우리의 생활 문화가 곧 관광 콘텐츠가 되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국가 단위가 아니라 관심사 단위로 다시 정렬해, 체류의 깊이와 경험의 밀도를 어떻게 높일지가 다음 과제라는 질문으로 사회 세션을 맺었습니다.
T 기술
기술 세션은 AI가 반도체와 로봇이라는 가장 까다로운 현장에 어떻게 들어가고 있는지를 다뤘습니다.
AI는 반도체를 어떻게 설계하고, 할루시네이션은 어떻게 잡나
반도체 설계에는 이미 AI가 들어와 있습니다. 칩을 그릴 때 쓰는 전문 설계 프로그램(EDA)에 AI를 결합해 설계 시간을 줄이고 전력·성능·면적을 자동으로 최적화하며, 칩의 동작을 코드로 적는 RTL 단계에서도 시나리오 생성과 코드 리뷰에 AI를 씁니다.
발표자는 그 해법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는데, 다른 업종에도 참고가 될 내용이었습니다. 첫째, AI는 후보안만 제안하고 최종 결정은 엔지니어가 단계마다 확인합니다. 이메일 초안을 AI에게 받되 판단은 사람이 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칩의 경로가 겹치는 식의 물리 법칙 위반을 단계마다 걸러냅니다. 셋째, 배선 최적화처럼 오래 걸리는 일은 AI가, 새 아키텍처나 안전 판단은 사람이 맡습니다. 넷째, 성공 사례를 강화학습으로 익힙니다. 다섯째, 설계 문서를 학습한 검색형 AI(RAG)에 단계별로 물으면 오류가 크게 줄어듭니다.
피지컬 AI라는 새 전장
후반부 주제는 피지컬 AI, 곧 현실 세계에 물리적 영향을 미치는 AI였습니다. 한 업계 집계에 따르면 2025년 글로벌 투자가 전년 대비 74% 늘었고, 전체 벤처캐피털 투자의 10%가량이 이쪽으로 향했습니다. 휴머노이드 시장은 2035년까지 여러 배로 커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미국은 플랫폼과 모델로 리더십을 쥐려 합니다. NVIDIA의 아이작심·코스모스 같은 로봇 제어 플랫폼을 표준으로 만들고, 그 위에서 테슬라 옵티머스와 피겨 AI, 로봇 제어 파운데이션 모델을 만드는 피지컬 인텔리전스가 움직입니다. 하드웨어 몸체만 있고 소프트웨어가 없는 회사는 이 모델을 가져다 쓸 수밖에 없는 생태계를 짜는 전략입니다.
미국·중국·한국의 로봇 삼국지
중국은 다른 길을 갑니다. 대량 생산과 표준화를 앞세우고 국가가 전방위로 지원합니다. 로봇 스타트업이면 일정 금액에 숙소까지 대고, 학교가 추천한 젊은 연구자에게 정부가 계속 투자를 합니다. 그 결과 산업 현장에는 애지봇, 연구 현장에는 유니트리가 많이 쓰이고, 로봇 손 점유율 80%의 링커봇, 하드웨어·AI 모델·데이터를 다 갖춘 갤봇도 나왔습니다. 갤봇은 다리가 없는데, 걷기보다 일하기가 먼저라며 현장에서 옮기고 나르는 일로 매출을 빠르게 확보합니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이 오픈소스로 중국 소스를 가져다 쓸 만큼, 피지컬 AI에서 중국의 추진력이 강하다는 평가였습니다.
한국의 강점은 제조에 있습니다. 세계 1위 제조 공장이 많고, 메모리·반도체 생태계와 현장의 컨피덴셜 데이터를 갖고 있습니다. 휴보를 만든 레인보우 로보틱스, 매출의 98%가 관절을 움직이는 동력 장치인 액츄에이터에서 나오는 로보티즈가 하드웨어를 받칩니다. 로보티즈는 휴머노이드가 만드는 족족 팔리자 하던 협업을 멈출 만큼 시장이 달아올랐습니다. 조선소에서 사람이 기어올라 하던 위험한 용접을 거미처럼 기어오르는 로봇으로 대신하는 디든로보틱스도 소개됐습니다. 발표자의 회사는 현장 데이터를 가진 대기업과 솔루션을 가진 스타트업을 잇는 작업을 올해 하반기부터 시작합니다.
이병한 작가의 3부작과 한국의 기회
발표자는 다른백년의 이병한 작가가 쓴 《아메리카 탐문》, 《테크노-차이나 탐문》, 《대한민국 탐문》 3부작으로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로 성공했지만, 기술을 밀어붙일 때는 중국식 효율을 부러워합니다. 반면, 중국은 기술과 청년 친화적 환경을 갖췄지만, 문화혁명으로 지식인 기반이 무너진 탓에 소프트 파워가 약하단 단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한국은 우수한 제조 기반과 IT 인프라,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국민성,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은 역사가 만든 긍정적 소프트파워를 함께 가졌습니다. 디지털 문명에 맞는 거버넌스를 한국이 앞서 만들 기회라는 것이 이병한 작가의 3부작 결론입니다. 피지컬 AI는 전 세계적으로 막 떠오른 분야라 참고할 선진 사례가 없습니다. 늘 미국·유럽의 레퍼런스를 찾던 컨설팅이 통하지 않는 만큼, 한국이 글로벌 표준이 될 비즈니스 모델을 먼저 만들지 않을까란 가설로 기술 세션을 맺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