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원님은 정치컨설팅을 하는 변호사다. 인터뷰어는 멀리하고픈 ‘정치’와 ‘법’을 가장 가까이 두고 일하는 셈이다. 정치가 컨설팅이 되는 영역인가 궁금증을 풀기 위한 인터뷰였는데 무료 강의를 듣고 왔다. 정확한 한글 표기법을 위해 검색을 한다. 최근에 이렇게 많은 학자들과 이론들을 찾아본 적이 있나 싶다. 각주도 달아야 하나 고민한다. 와인을 들고 와주신 덕에 법학 박사과정 연구이야기, 사회혁신 디자인/IT기업에서 브랜드컨설팅 사업부도 이끌고 있는 딱딱한 이야기들이 흥미로운 취중 토크가 되었다.
HFK에서는 [PEST 브리핑] 정치분야 큐레이팅을 통해 관심을 북돋고, [문제해결사] 테마로 진정한 협상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있다. 와이프와 일/육아 스케줄을 협의 할 때도 ‘듀얼 커리어 커플의 성공 케이스’ 논문이 오가는 생활 속 협상가인 덕분일까. 다양해 보이는 이력들에 놀라움을 드러내자 모두 ‘권력’이라는 핵심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말한다. 수많은 이야기들을 지면도 없는데 지면 상의 이유(?)로 싣지 못해 안타깝기만 하다.
상대와 조직을 어떻게 설득하고 움직이게 할 것인지, 개인과 집단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끊임 없이 고민하고 경험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최초의 질문은
‘권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였습니다.
정치,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떤 매력에 끌린 걸까요
정치에서 제일 관심이 있었던 것은 ‘조직 다이나믹’이예요. 조직 내에 권력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서요. 폭력적인 방법으로 억압해서 권력을 얻을 수도 있지만 정치인은 그럴 수 없거든요.
‘어떻게 권력이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은 군대 트라우마로 시작되었어요. ‘맞짱 뜨면 이길 수 있는 거 같은데, 왜 목숨 걸고 저 사람 말을 듣지? 심지어 왜 아무도 저항을 못하지?’ 그 사회에서 말 한마디면 한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이 전략적이고 체계적이었어요. 거기서부터 출발했고 그래서 더 치열했던 거 같아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그런 것들이 궁금했죠. 더 크게 ‘역사적으로 독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어떻게 사람들은 이렇게 우매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그래서 조직 다이나믹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했죠. 그리고 만약에 내가 그런 방법을 안다면 어떻게 최대한 좋은 곳에 사용될 수 있는지 까지 고민하게 되었죠.
한국에서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국제정치를 공부하러 보스톤까지 가셨어요.
생명공학과 다닐 때도 철학, 논리학에 관심이 많았고 겉멋이 들어서 ‘노엄 촘스키’라는 학자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정치적인 발언을 하면서 뇌과학을 공부하는 모습을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인지과학’ 분야를 공부해보고자 생명공학과를 들어갔던 거였죠. 군대 다녀와서 정경학부로 전과하고 싶은데 학교에서 안된다고 했어요. 수능을 다시 보고 들어오든지, 이중 전공을 하든지 선택하라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학교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갔어요. 보스톤은 촘스키 등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라 선택했죠. 미국에 아는 사람 아무도 없고 준비도 없이 무작정 갔어요.
가서 거의 1년 반 동안 시험만 본거 같아요. SAT 등 미국 고등학생들이 준비하는 시험을 다 봤죠. 보통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우리나라로 치면 전문대인 커뮤니티 컬리지에 편입하는 코스를 거치는데 저는 계속 촘스키만 생각나는 거예요. ‘그가 강의하는 MIT나 하버드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계속 하면서 SAT를 준비한거죠. 이과였기 때문에 언어는 좀 잘 안나도 SAT 수학, 과학은 다 만점이 나왔어요. 조지타운도 합격했는데 보스턴을 떠나기도 싫었고 더 자유롭고 다양성이 강조되는 터프츠Tufts 대학교에 갔습니다.
보스톤은 노벨상 탄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스치는 곳 이예요. 노엄 촘스키가 한국 식당에서 밥먹고, 커피숍 옆자리에 하워드 진(미국의 역사학자)이 앉아있고, 독립서점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북토크도 하구요. 보스톤은 이런 일들이 흔한 매력적인 도시였죠. 대학 입학 전에 하버드에서 청강도 했어요. 멘큐에게 경제학도 듣고. 학부 청강은 제지하지 않아 욕심내서 케네디 스쿨 강의도 들어갔는데 ‘어디서 오셨냐’ 묻길래 ‘사실은 하버드 들어오고 싶은 학생인데..‘ 그랬더니 바로 쫓겨났어요.
한국과 보스턴에서정치수업을들었을때차이가있을까요
완전 다르죠. 일단, 한국이 수업이라면 미국은 교육입니다. 한국에서는 근대화, 민주화 같은 정치의 역사와 이론이 전부라면, 미국에서는 ‘어떻게 선거에서 이기는가’ 일종의 정치공학도 같이 배워요. 수업도 선거 캠페인 컨설팅 하는 사람이 와서 강의하죠. 우리나라에는 그런 직업조차 없는데 말이죠. 미국은 선거 캠페인 시장이 매우 발전했고, 광고시장보다 커요. 사람들을 어떻게 설정 해야하는지 프레임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알았죠. 이렇게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고 이렇게 조종하고. 이게 권력이 작동해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거구나. 처음 안거예요. 그때 ‘이거다, 나는 이거 한다’ 생각을 했죠.
‘미국 시민도 아닌데 괜찮겠어?’
무조건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정치캠페인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죠
학교 졸업하고 미국 정치캠페인 회사에서 어떻게 일하게 되셨나요.
4-2학기 ‘미국의 정치캠페인’이라는 수업을 정치컨설팅 회사의 파트너가 와서 직접했어요. 미국은 그게 좋아요. 맥킨지 컨설팅 파트너가 와서 경영학 수업을 합니다. 그런 시스템이 굉장히 잘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교수님에게 일 하고 싶다 했더니 그분이 ‘미국 시민도 아닌데 괜찮겠어?’ 라고 했지만 ‘무조건 하고 싶다’해서 인턴을 거쳐 일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케네디 상원이 돌아가시고 보궐 선거를 맡아서 할 때 저는 아시안 커뮤니티를 맡아서 하는 경험을 했죠.
정치캠페인 회사라고 했을 때 어떤 일을 하는지 감이 안잡혀요. 우리나라에는 전문성 있는 곳이 거의 전무 하잖아요.
우리나라의 김앤장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죠. 미국 정치컨설팅 파트너들은 대부분 변호사나 광고 PD입니다. 그 둘의 만남이죠. 입법을 통해 로비하는 사람과 대중을 선동하는 두 가지 역할이 주죠. 로비라는 건 인적자원과 돈을 가지고 입법과정에 들어가서 핵심 이해관계자들을 만나서 설득하는 거에요. 로비회사들의 생명은 클라이언트인 수많은 시민단체, PAC(Political Action Committee)이라는 엄청난 정치단체입니다. 미국은 정치활동을 하는 단체가 법인으로 인정이 되고 돈으로 정치광고나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보장이 되어 있어요. 우리나라는 그게 안되거든요. 대부분 그 PAC을 운영하는 곳은 담배협회, 총기협회 등이고 정당과 연결이 되어있어요. 정당은 산업과 시민단체와 촘촘하게 연결이 되어있는데 그 중간에 브로커 역할을 로비회사가 합니다. 그 안에서 광고를 만들어서 대중을 선동하기도 하고, 선거에 참여하기도 하고, 정치자금을 모아서 후원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조직하고 모아서 활동하기도 하는 거죠. 미국 드라마 ‘굿와이프’의 ‘일라이 골드’가 하는 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좀더 현실적인 로비스트를 들여다 보고 싶다면 영화 ‘미스 슬로운’을 추천드립니다.
말빨로 싸우는 세상에서
외국인인 저는 마이너 였어요
‘한국에서 하면 되지.
내가 가서 하면 최초일 걸’
이라 생각하며 돌아왔습니다.
미국에서 일을 하다가 어떤 계기로 한국으로 돌아 오게 되었나요?
제일 큰 이유는 ‘시민권도 없는데 미국에서 정치관련 일을 하면서 더 올라갈 수는 없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영어 때문이기도 했죠. 말빨로 싸우는 세상에서 나는 계속 마이너였고, 비자가 끝나가기도 했구요. 로비회사 파트너들이 대부분 변호사였고 ‘저런걸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미국 로스쿨이냐, 한국 로스쿨이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조지 워싱턴 로스쿨 붙었는데 한국에서 정치컨설턴트를 하고 싶어서 한국 로스쿨을 왔어요. 미국에서는 변호사가 되도 이민법이나 부동산을 할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학교와 직업세계에서는 인종에 대한 대우가 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한국 가서 하면 되지. 내가 가서 하면 최초일걸?’ 하는 생각과 그때는 솔직히 정치를 하고 싶단 생각도 있었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서 하면 재미있겠다’ 생각을 하고 들어왔죠.
한국 들어가자마자 인권법 단체에서 소수자를 차별하는 법을 무효화 시키는 위헌 재판을 도왔구요. 로비도 하다 왔으니 그런 쪽이 재미있어 보였죠. 1년동안 인턴하면서 공부해서 그 다음해에 로스쿨을 들어갔습니다.
로스쿨 졸업하고 정치컨설턴트의 삶은 어떻게 시작하셨고, 한국과 미국은 어떻게 달랐나요.
로스쿨 졸업 즈음 검사 최종면접까지 갔었어요.거기서 2주동안 인턴을 합니다. ‘시보’라고 보통 부르는데, 전국 학교에서 40명이 모여 검사 연수원에서 집단으로 교육받고 시험을 보죠. 회식자리에서 검사장이 술을 주시는데 제가 술을 못 마신다고 했더니 그게 전설이 됐다고 하시더라구요. “쟤는 여기 왜왔냐, 검사 될 생각이 없다.” 이런 식으로.
검사 안되고 로펌에서 인턴도 했는데 선배들 생활하는 거 보니까 앉아서 손에 골무끼고 서류만보고 주말도 없고 그래서 ‘그래, 내가 로비하려고 여기 왔었지’라는 생각을 그때 다시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정치컨설팅 하는 곳을 찾았더니 딱 한군데 나왔어요.
변호사 시험 합격하고 나서 거기서 일하고 싶다 했는데 계속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니가 오면 힘들 것이다. 변호사가 만족할 만한 일은 아닐거다’ 했는데 역시나 힘든 일이었죠. 막상 한국의 선거판은 전문가의 영역이라기 보다 정치권 주변에서 오래 일해온 분들이나 정치에 닳고 닳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어요. 한국정치 자체가 미국처럼 정치마케팅 시장이 있는 산업이 아니라서 선거가 그런 방식으로 가진 않았죠. 여론조사를 해서 전문적인 전략을 짜서 가기보다는 지역에 있는 조직가들을 모아서 합니다. 심지어 정치컨설팅을 언론이 다 해요.
그 곳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일이 2016년 4월 총선입니다. 경남 김해와 서울 강서 쪽 국회의원 선거를 마지막으로 하고 나왔죠. 컨설팅이라기 보다 홍보물로 돈을 버는 사실상 인쇄사업이었어요. 정치자금법이 선거비용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었죠. 왜냐면 우리나라에서는 선거를 하면 국가에서 보존해주는 모델입니다. ‘선거공영제’라고 해서 돈 없는 사람이 선거 못한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든 법입니다. 취지는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에는 어디에 얼마를 써야 한다는 게 대략 매뉴얼이 있고, 거기에는 컨설팅 항목은 없죠. 그래서 정치컨설턴트는 무엇으로 돈을 버냐면 홍보물 인쇄와 여론조사로 마진을 붙입니다. 이윤이 많이 남지 않고 비즈니스 자체가 후진적이니 버티기가 힘들었죠. 회사를 나와서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PR, 위기관리, 마케팅 등을 다 할 줄 아니 여러 의뢰를 받을 수 있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 덕분에 바로 대선 경선 캠페인도 맡아서 진행했죠.
위기관리, PR, 마케팅, 퍼스널 브랜딩 분야의 경력은 어떻게 쌓게 되신건가요?
한국에서 선거캠페인 하면서 다 하게 된거죠. 제일 많이 했던 것이 유권자 조사였습니다. 정책적으로 어떻게 세분화 되어있고, 어떤 유권자들을 타겟팅 해야 할지 마케팅 공부를 하기 시작한거죠. 선거조사는 직접 들어가서 다 확인합니다. 해당 지역에 들어가서 한 달 동안 시장, 아파트 부녀회, 네일샵, 미용실을 다 찾아 다니면서 인터뷰를 하죠. 후보자에 관련해서 그 지역의 정서, 그 지역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의식,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그때 정성조사 트레이닝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선거에서는 ‘이 후보는 이거 하는 사람이야’ 라는 걸 심어주는 프레임이 중요해요. 엄마한테는 육아, 교육이슈가 가장 크죠. 그리고 잘생겼는지! 선거하면서 유권자 조사가 핵심이었고 다음으로 퍼스널 브랜딩 이었어요. 어떤 프레임으로 잡아야 하고, 어느 타겟을 어떤 방식으로 공략해야하는지, 어디를 가야하고, 누구를 만나야 하고 그야말로 퍼스널 브랜딩과 마케팅 전략을 세웠던 거죠. 후보에 대해서도 10시간 이상 인터뷰를 하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다 알게 되는데 그걸 바탕으로 내가 나를 어떻게 설명할지에 대한 메세지 박스 만들고 캠페인 슬로건 만듭니다. 그 안에서 나에게 유리한 이슈가 뭐고 유리한 방식의 프레임이 뭔지 만들고, 인터뷰 예상질문과 거기에 맞는 답들의 핵심을 다 만들어놓죠. 이런 것들이 매뉴얼화 되어있는 미국에서 배웠던 것들입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하지 않았던 것들이고, 저만 할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이 통했죠.
지금 재직중인 회사 슬로워크에서도 조직 디자인, 브랜드 컨설팅을 하시잖아요. 다 연결이 되어 있네요.
네 맞아요. 그 핵심역량 가지고, 여러 일을 하고 있죠. 여기서도 프로젝트는 정성리서치부터 시작 하거든요. 300명규모의 조직에 들어가면 임원부터 신입사원, 파견직원까지 40-50명정도 인터뷰를 해요. ‘한국 갤럽’ 리브랜딩 프로젝트, ‘서울신용보증재단’ 조직디자인도 그 방식을 적용했죠.
조직 디자인 할 때 정체성이나 상태 분석을 합니다. 조직이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부터 어떤 이벤트를 조직구성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등 화석 같은 직원들을 찾아 다니면서 인터뷰하죠. 그럼 쭉 무슨 일을 겪었는지 지도가 그려집니다. 3년차 이하 신입사원들에게는 ‘이 조직에 와서 무엇이 가장 이상했는가’를 묻기 시작하면 탁탁 매치가 되기 시작해요. 조직 내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지점들이 신입 눈에는 보이니까. 저희한테 의뢰하시는 분들 대다수는 전략이 변하거나 새로운 리더가 바뀌어서 비전이 변할 때 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왜 안되는지를 정성조사를 토대로 말해주기 시작하면 좋아하시더라구요. 몰랐다 자기는 이러면서요. 저희는 안에서 하고 싶은 방향을 도와드린 거죠 사실.
저는 수평적 조직문화, 시스템 맹신하지 않아요.
결국 사람이예요.
그 리더가 뿜어내는 말과 비전이
전부죠.
HFK하면서 도움이 된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협상’이라는 커리어를 HFK에서 만들게 되었어요. 제 커리어에 협상은 없었거든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하버드에서 협상강의를 들었어요. 그때는 이런 것이 있구나 했었고 이걸 가지고 내가 뭘 해야지 이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HFK 멤버로 참여하던 중 재윤님이 HBR의 협상과 관련된 아티클에 대해 큐레이션 기회를 제안해 주셨어요. 그때 ‘케이스, 롤플레잉 이라는게 있었지’ 생각이 나면서 협상 워크샵을 하게 됐는데 반응이 좋아서 그때부터 계속 하기 시작했어요. 하다 보니 대학에서도 할 기회가 생겼고, 연세대, 국민대에서도 협상 워크샵을 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HFK의 [문제해결사] 테마가 된거예요. HFK에서 큐레이션 시작하고 워크샵 하게 되면서 ‘협상이라는 부분을 하나의 커리어로 가져가도 되겠구나’ 스스로 깨닫게 됐죠.
학부생 강의는 학점 채우려고 온 학생이 대다수라 수업의 집중도가 떨어지는데, MBA나 로스쿨, HFK에서 할 때는 다릅니다. 진짜 필요해서 오신 분들이니 진지함이나 태도가 많이 다르죠. 로스쿨과 MBA는 좀 재미있는 점이 ‘니가 뭐하나 보자’ 이런 태도가 보이긴 해요. 특히 Excutive MBA가면 이사님, 사장님, 대표님 등 쟁쟁한 분들이 와 계세요. ‘내가 협상을 해봤지, 니가 협상을 해봤겠니 그런 거 아니야’ 이런 마인드라 좀 힘들기도 하죠. 그분들은 롤플레잉을 하는데 자신은 잘 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몰입이 잘 되지 않아서 더 힘들어요. 그래서 내가 한 10년쯤 해야 저분들과 맞짱을 뜰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HFK 문제해결사 테마를 오시는 분들의 몰입도가 제일 좋죠. 그래서 더 재미있어요.
어떤 후배를 좋아하세요
리쿠루팅 할 때 제일 먼저 보는 점이 이전에 다닌 회사를 어떻게 욕하나를 봐요. 욕하지 않는 사람은 안 뽑죠. 몸담았던 조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런 점은 좀 아니다’ 라는 관점을 보고 싶은 거죠. 특히 자기사업 하고 싶고, 오래 안 있을 사람 뽑으려고 해요. 자기 사업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여기 와서 어떤 일을 해도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일할 사람이예요. ‘내가 왜 이런걸 해야 해요’ 묻지 않죠.
그리고. ‘2년이상 회사에 계속 있지 말아라. 있더라도 최소한 다른 포지션으로 성장해야한다’ 라고 말해주죠. 예를 들어 디자이너로 들어왔다면 프로덕트 매니저나 기획자 등 다른 포지션으로 변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여기 와서 성장할거 아니면 들어오지 않는 것이 좋고, 너의 성장에 회사가 못 따라가면 나가라’라고 말해줍니다. 대신에 성장에 대한 긴장을 늦추는 거는 용납하지 않아요. ‘프로젝트를 못 따거나 그런 건 그냥 굶으면 되지만 배우지 못하면 죽는다. 돈 못벌어서 경영진의 압력이 오면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지만 너희들이 성장을 못하는 건 내가 어떻게 못한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롤 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회사 상사에게서 찾아본 적은 없고, 대부분 학자에게서 찾은 거 같아요. 노엄 촘스키도 학자이면서 정치참여도 하고 모든 분야를 섭렵하는 사람이니까. 요즘은 ‘에드거 샤인’이라는 조직문화 구루도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분이예요. 학문적으로 어마어마한 업적도 만들었고 컨설팅 영역에서도 조직을 변화시키는 부분에 큰 역할을 하신 분이죠. 그렇게 평생 연구를 하면서 컨설팅이든 사회적인 어떤 활동을 계속 하는 분. 항상 현장에서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의미에서 ‘에드거 샤인’ 을 롤모델로 삼고 존경해요.
아 그리고 사실은 사랑에 빠진 사람은 오바마에요. 보스톤 있을 때 컨벤션에서 직접 보고 아우라에 미쳐버렸던 기억이 있어요. 남자가 봐도 매력이 넘치죠. 어메이징 그레이스 노래 부를 때도, 오바마 연설 들으면서도 ‘저런 게 정치인이구나. 와 저게 권력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저는 수평적 조직문화, 시스템 맹신하지 않아요. 결국 사람이예요. 그 리더가 뿜어내는 말과 비전이 전부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이야기 하지만 민주주의도 이것을 이끌어 가는 리더에 의해서 만들어 지고 결국 리더의 문제구나 라고 생각 합니다.
나에게 일이란?
나에게 일은 공부죠. 궁금한 것이 많고 공부하지 않으면 삶에서 재미를 못 느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물론 음악, 연극 등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하는데, 와이프는 요즘 이런 이야기를 해요. ‘당신이 요즘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무대 서는 걸 안해서 그렇다. 연애시절에 당신은 1년에 한번은 무대에 섰다’ 제가 학창시절에 색소폰으로 밴드 생활하고, 연극활동도 하고 그랬거든요. 학교 다닐 때는 예술, 음악이 굉장히 하고 싶었어요. 근데 지금은 다 끝났어요. 두아이 키우면서 육아로 30대에 모든걸 다 내려놨죠. 30대가 저의 암흑의 시대입니다. 하하하
퍼포먼스 하는 거 하나, 공부하는 것 이 두 개가 사는 이유 같긴 합니다. 무대에 서는 일이 강연이 될 수 있고 워크샵이 될 수 있고 그런 걸로 푼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공부하며 활동하는 정치컨설턴트, 이강원
이강원
HFK Content Partner (PEST 브리핑, 문제해결사)
이강원님은 정치컨설팅을 하는 변호사다. 인터뷰어는 멀리하고픈 ‘정치’와 ‘법’을 가장 가까이 두고 일하는 셈이다. 정치가 컨설팅이 되는 영역인가 궁금증을 풀기 위한 인터뷰였는데 무료 강의를 듣고 왔다. 정확한 한글 표기법을 위해 검색을 한다. 최근에 이렇게 많은 학자들과 이론들을 찾아본 적이 있나 싶다. 각주도 달아야 하나 고민한다. 와인을 들고 와주신 덕에 법학 박사과정 연구이야기, 사회혁신 디자인/IT기업에서 브랜드컨설팅 사업부도 이끌고 있는 딱딱한 이야기들이 흥미로운 취중 토크가 되었다.
HFK에서는 [PEST 브리핑] 정치분야 큐레이팅을 통해 관심을 북돋고, [문제해결사] 테마로 진정한 협상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있다. 와이프와 일/육아 스케줄을 협의 할 때도 ‘듀얼 커리어 커플의 성공 케이스’ 논문이 오가는 생활 속 협상가인 덕분일까. 다양해 보이는 이력들에 놀라움을 드러내자 모두 ‘권력’이라는 핵심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말한다. 수많은 이야기들을 지면도 없는데 지면 상의 이유(?)로 싣지 못해 안타깝기만 하다.
상대와 조직을 어떻게 설득하고 움직이게 할 것인지, 개인과 집단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끊임 없이 고민하고 경험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최초의 질문은
‘권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였습니다.
정치,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떤 매력에 끌린 걸까요
정치에서 제일 관심이 있었던 것은 ‘조직 다이나믹’이예요. 조직 내에 권력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서요. 폭력적인 방법으로 억압해서 권력을 얻을 수도 있지만 정치인은 그럴 수 없거든요.
‘어떻게 권력이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은 군대 트라우마로 시작되었어요. ‘맞짱 뜨면 이길 수 있는 거 같은데, 왜 목숨 걸고 저 사람 말을 듣지? 심지어 왜 아무도 저항을 못하지?’ 그 사회에서 말 한마디면 한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이 전략적이고 체계적이었어요. 거기서부터 출발했고 그래서 더 치열했던 거 같아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그런 것들이 궁금했죠. 더 크게 ‘역사적으로 독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어떻게 사람들은 이렇게 우매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그래서 조직 다이나믹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했죠. 그리고 만약에 내가 그런 방법을 안다면 어떻게 최대한 좋은 곳에 사용될 수 있는지 까지 고민하게 되었죠.
한국에서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국제정치를 공부하러 보스톤까지 가셨어요.
생명공학과 다닐 때도 철학, 논리학에 관심이 많았고 겉멋이 들어서 ‘노엄 촘스키’라는 학자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정치적인 발언을 하면서 뇌과학을 공부하는 모습을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인지과학’ 분야를 공부해보고자 생명공학과를 들어갔던 거였죠. 군대 다녀와서 정경학부로 전과하고 싶은데 학교에서 안된다고 했어요. 수능을 다시 보고 들어오든지, 이중 전공을 하든지 선택하라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학교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갔어요. 보스톤은 촘스키 등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라 선택했죠. 미국에 아는 사람 아무도 없고 준비도 없이 무작정 갔어요.
가서 거의 1년 반 동안 시험만 본거 같아요. SAT 등 미국 고등학생들이 준비하는 시험을 다 봤죠. 보통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우리나라로 치면 전문대인 커뮤니티 컬리지에 편입하는 코스를 거치는데 저는 계속 촘스키만 생각나는 거예요. ‘그가 강의하는 MIT나 하버드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계속 하면서 SAT를 준비한거죠. 이과였기 때문에 언어는 좀 잘 안나도 SAT 수학, 과학은 다 만점이 나왔어요. 조지타운도 합격했는데 보스턴을 떠나기도 싫었고 더 자유롭고 다양성이 강조되는 터프츠Tufts 대학교에 갔습니다.
보스톤은 노벨상 탄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스치는 곳 이예요. 노엄 촘스키가 한국 식당에서 밥먹고, 커피숍 옆자리에 하워드 진(미국의 역사학자)이 앉아있고, 독립서점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북토크도 하구요. 보스톤은 이런 일들이 흔한 매력적인 도시였죠. 대학 입학 전에 하버드에서 청강도 했어요. 멘큐에게 경제학도 듣고. 학부 청강은 제지하지 않아 욕심내서 케네디 스쿨 강의도 들어갔는데 ‘어디서 오셨냐’ 묻길래 ‘사실은 하버드 들어오고 싶은 학생인데..‘ 그랬더니 바로 쫓겨났어요.
한국과 보스턴에서 정치수업을 들었을 때 차이가 있을까요
완전 다르죠. 일단, 한국이 수업이라면 미국은 교육입니다. 한국에서는 근대화, 민주화 같은 정치의 역사와 이론이 전부라면, 미국에서는 ‘어떻게 선거에서 이기는가’ 일종의 정치공학도 같이 배워요. 수업도 선거 캠페인 컨설팅 하는 사람이 와서 강의하죠. 우리나라에는 그런 직업조차 없는데 말이죠. 미국은 선거 캠페인 시장이 매우 발전했고, 광고시장보다 커요. 사람들을 어떻게 설정 해야하는지 프레임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알았죠. 이렇게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고 이렇게 조종하고. 이게 권력이 작동해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거구나. 처음 안거예요. 그때 ‘이거다, 나는 이거 한다’ 생각을 했죠.
‘미국 시민도 아닌데 괜찮겠어?’
무조건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정치캠페인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죠
학교 졸업하고 미국 정치캠페인 회사에서 어떻게 일하게 되셨나요.
4-2학기 ‘미국의 정치캠페인’이라는 수업을 정치컨설팅 회사의 파트너가 와서 직접했어요. 미국은 그게 좋아요. 맥킨지 컨설팅 파트너가 와서 경영학 수업을 합니다. 그런 시스템이 굉장히 잘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교수님에게 일 하고 싶다 했더니 그분이 ‘미국 시민도 아닌데 괜찮겠어?’ 라고 했지만 ‘무조건 하고 싶다’해서 인턴을 거쳐 일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케네디 상원이 돌아가시고 보궐 선거를 맡아서 할 때 저는 아시안 커뮤니티를 맡아서 하는 경험을 했죠.
정치캠페인 회사라고 했을 때 어떤 일을 하는지 감이 안잡혀요. 우리나라에는 전문성 있는 곳이 거의 전무 하잖아요.
우리나라의 김앤장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죠. 미국 정치컨설팅 파트너들은 대부분 변호사나 광고 PD입니다. 그 둘의 만남이죠. 입법을 통해 로비하는 사람과 대중을 선동하는 두 가지 역할이 주죠. 로비라는 건 인적자원과 돈을 가지고 입법과정에 들어가서 핵심 이해관계자들을 만나서 설득하는 거에요. 로비회사들의 생명은 클라이언트인 수많은 시민단체, PAC(Political Action Committee)이라는 엄청난 정치단체입니다. 미국은 정치활동을 하는 단체가 법인으로 인정이 되고 돈으로 정치광고나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보장이 되어 있어요. 우리나라는 그게 안되거든요. 대부분 그 PAC을 운영하는 곳은 담배협회, 총기협회 등이고 정당과 연결이 되어있어요. 정당은 산업과 시민단체와 촘촘하게 연결이 되어있는데 그 중간에 브로커 역할을 로비회사가 합니다. 그 안에서 광고를 만들어서 대중을 선동하기도 하고, 선거에 참여하기도 하고, 정치자금을 모아서 후원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조직하고 모아서 활동하기도 하는 거죠. 미국 드라마 ‘굿와이프’의 ‘일라이 골드’가 하는 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좀더 현실적인 로비스트를 들여다 보고 싶다면 영화 ‘미스 슬로운’을 추천드립니다.
말빨로 싸우는 세상에서
외국인인 저는 마이너 였어요
‘한국에서 하면 되지.
내가 가서 하면 최초일 걸’
이라 생각하며 돌아왔습니다.
미국에서 일을 하다가 어떤 계기로 한국으로 돌아 오게 되었나요?
제일 큰 이유는 ‘시민권도 없는데 미국에서 정치관련 일을 하면서 더 올라갈 수는 없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영어 때문이기도 했죠. 말빨로 싸우는 세상에서 나는 계속 마이너였고, 비자가 끝나가기도 했구요. 로비회사 파트너들이 대부분 변호사였고 ‘저런걸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미국 로스쿨이냐, 한국 로스쿨이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조지 워싱턴 로스쿨 붙었는데 한국에서 정치컨설턴트를 하고 싶어서 한국 로스쿨을 왔어요. 미국에서는 변호사가 되도 이민법이나 부동산을 할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학교와 직업세계에서는 인종에 대한 대우가 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한국 가서 하면 되지. 내가 가서 하면 최초일걸?’ 하는 생각과 그때는 솔직히 정치를 하고 싶단 생각도 있었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서 하면 재미있겠다’ 생각을 하고 들어왔죠.
한국 들어가자마자 인권법 단체에서 소수자를 차별하는 법을 무효화 시키는 위헌 재판을 도왔구요. 로비도 하다 왔으니 그런 쪽이 재미있어 보였죠. 1년동안 인턴하면서 공부해서 그 다음해에 로스쿨을 들어갔습니다.
로스쿨 졸업하고 정치컨설턴트의 삶은 어떻게 시작하셨고, 한국과 미국은 어떻게 달랐나요.
로스쿨 졸업 즈음 검사 최종면접까지 갔었어요.거기서 2주동안 인턴을 합니다. ‘시보’라고 보통 부르는데, 전국 학교에서 40명이 모여 검사 연수원에서 집단으로 교육받고 시험을 보죠. 회식자리에서 검사장이 술을 주시는데 제가 술을 못 마신다고 했더니 그게 전설이 됐다고 하시더라구요. “쟤는 여기 왜왔냐, 검사 될 생각이 없다.” 이런 식으로.
검사 안되고 로펌에서 인턴도 했는데 선배들 생활하는 거 보니까 앉아서 손에 골무끼고 서류만보고 주말도 없고 그래서 ‘그래, 내가 로비하려고 여기 왔었지’라는 생각을 그때 다시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정치컨설팅 하는 곳을 찾았더니 딱 한군데 나왔어요.
변호사 시험 합격하고 나서 거기서 일하고 싶다 했는데 계속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니가 오면 힘들 것이다. 변호사가 만족할 만한 일은 아닐거다’ 했는데 역시나 힘든 일이었죠. 막상 한국의 선거판은 전문가의 영역이라기 보다 정치권 주변에서 오래 일해온 분들이나 정치에 닳고 닳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어요. 한국정치 자체가 미국처럼 정치마케팅 시장이 있는 산업이 아니라서 선거가 그런 방식으로 가진 않았죠. 여론조사를 해서 전문적인 전략을 짜서 가기보다는 지역에 있는 조직가들을 모아서 합니다. 심지어 정치컨설팅을 언론이 다 해요.
그 곳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일이 2016년 4월 총선입니다. 경남 김해와 서울 강서 쪽 국회의원 선거를 마지막으로 하고 나왔죠. 컨설팅이라기 보다 홍보물로 돈을 버는 사실상 인쇄사업이었어요. 정치자금법이 선거비용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었죠. 왜냐면 우리나라에서는 선거를 하면 국가에서 보존해주는 모델입니다. ‘선거공영제’라고 해서 돈 없는 사람이 선거 못한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든 법입니다. 취지는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에는 어디에 얼마를 써야 한다는 게 대략 매뉴얼이 있고, 거기에는 컨설팅 항목은 없죠. 그래서 정치컨설턴트는 무엇으로 돈을 버냐면 홍보물 인쇄와 여론조사로 마진을 붙입니다. 이윤이 많이 남지 않고 비즈니스 자체가 후진적이니 버티기가 힘들었죠. 회사를 나와서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PR, 위기관리, 마케팅 등을 다 할 줄 아니 여러 의뢰를 받을 수 있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 덕분에 바로 대선 경선 캠페인도 맡아서 진행했죠.
위기관리, PR, 마케팅, 퍼스널 브랜딩 분야의 경력은 어떻게 쌓게 되신건가요?
한국에서 선거캠페인 하면서 다 하게 된거죠. 제일 많이 했던 것이 유권자 조사였습니다. 정책적으로 어떻게 세분화 되어있고, 어떤 유권자들을 타겟팅 해야 할지 마케팅 공부를 하기 시작한거죠. 선거조사는 직접 들어가서 다 확인합니다. 해당 지역에 들어가서 한 달 동안 시장, 아파트 부녀회, 네일샵, 미용실을 다 찾아 다니면서 인터뷰를 하죠. 후보자에 관련해서 그 지역의 정서, 그 지역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의식,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그때 정성조사 트레이닝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선거에서는 ‘이 후보는 이거 하는 사람이야’ 라는 걸 심어주는 프레임이 중요해요. 엄마한테는 육아, 교육이슈가 가장 크죠. 그리고 잘생겼는지! 선거하면서 유권자 조사가 핵심이었고 다음으로 퍼스널 브랜딩 이었어요. 어떤 프레임으로 잡아야 하고, 어느 타겟을 어떤 방식으로 공략해야하는지, 어디를 가야하고, 누구를 만나야 하고 그야말로 퍼스널 브랜딩과 마케팅 전략을 세웠던 거죠. 후보에 대해서도 10시간 이상 인터뷰를 하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다 알게 되는데 그걸 바탕으로 내가 나를 어떻게 설명할지에 대한 메세지 박스 만들고 캠페인 슬로건 만듭니다. 그 안에서 나에게 유리한 이슈가 뭐고 유리한 방식의 프레임이 뭔지 만들고, 인터뷰 예상질문과 거기에 맞는 답들의 핵심을 다 만들어놓죠. 이런 것들이 매뉴얼화 되어있는 미국에서 배웠던 것들입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하지 않았던 것들이고, 저만 할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이 통했죠.
지금 재직중인 회사 슬로워크에서도 조직 디자인, 브랜드 컨설팅을 하시잖아요. 다 연결이 되어 있네요.
네 맞아요. 그 핵심역량 가지고, 여러 일을 하고 있죠. 여기서도 프로젝트는 정성리서치부터 시작 하거든요. 300명규모의 조직에 들어가면 임원부터 신입사원, 파견직원까지 40-50명정도 인터뷰를 해요. ‘한국 갤럽’ 리브랜딩 프로젝트, ‘서울신용보증재단’ 조직디자인도 그 방식을 적용했죠.
조직 디자인 할 때 정체성이나 상태 분석을 합니다. 조직이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부터 어떤 이벤트를 조직구성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등 화석 같은 직원들을 찾아 다니면서 인터뷰하죠. 그럼 쭉 무슨 일을 겪었는지 지도가 그려집니다. 3년차 이하 신입사원들에게는 ‘이 조직에 와서 무엇이 가장 이상했는가’를 묻기 시작하면 탁탁 매치가 되기 시작해요. 조직 내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지점들이 신입 눈에는 보이니까. 저희한테 의뢰하시는 분들 대다수는 전략이 변하거나 새로운 리더가 바뀌어서 비전이 변할 때 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왜 안되는지를 정성조사를 토대로 말해주기 시작하면 좋아하시더라구요. 몰랐다 자기는 이러면서요. 저희는 안에서 하고 싶은 방향을 도와드린 거죠 사실.
저는 수평적 조직문화, 시스템 맹신하지 않아요.
결국 사람이예요.
그 리더가 뿜어내는 말과 비전이
전부죠.
HFK하면서 도움이 된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협상’이라는 커리어를 HFK에서 만들게 되었어요. 제 커리어에 협상은 없었거든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하버드에서 협상강의를 들었어요. 그때는 이런 것이 있구나 했었고 이걸 가지고 내가 뭘 해야지 이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HFK 멤버로 참여하던 중 재윤님이 HBR의 협상과 관련된 아티클에 대해 큐레이션 기회를 제안해 주셨어요. 그때 ‘케이스, 롤플레잉 이라는게 있었지’ 생각이 나면서 협상 워크샵을 하게 됐는데 반응이 좋아서 그때부터 계속 하기 시작했어요. 하다 보니 대학에서도 할 기회가 생겼고, 연세대, 국민대에서도 협상 워크샵을 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HFK의 [문제해결사] 테마가 된거예요. HFK에서 큐레이션 시작하고 워크샵 하게 되면서 ‘협상이라는 부분을 하나의 커리어로 가져가도 되겠구나’ 스스로 깨닫게 됐죠.
학부생 강의는 학점 채우려고 온 학생이 대다수라 수업의 집중도가 떨어지는데, MBA나 로스쿨, HFK에서 할 때는 다릅니다. 진짜 필요해서 오신 분들이니 진지함이나 태도가 많이 다르죠. 로스쿨과 MBA는 좀 재미있는 점이 ‘니가 뭐하나 보자’ 이런 태도가 보이긴 해요. 특히 Excutive MBA가면 이사님, 사장님, 대표님 등 쟁쟁한 분들이 와 계세요. ‘내가 협상을 해봤지, 니가 협상을 해봤겠니 그런 거 아니야’ 이런 마인드라 좀 힘들기도 하죠. 그분들은 롤플레잉을 하는데 자신은 잘 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몰입이 잘 되지 않아서 더 힘들어요. 그래서 내가 한 10년쯤 해야 저분들과 맞짱을 뜰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HFK 문제해결사 테마를 오시는 분들의 몰입도가 제일 좋죠. 그래서 더 재미있어요.
어떤 후배를 좋아하세요
리쿠루팅 할 때 제일 먼저 보는 점이 이전에 다닌 회사를 어떻게 욕하나를 봐요. 욕하지 않는 사람은 안 뽑죠. 몸담았던 조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런 점은 좀 아니다’ 라는 관점을 보고 싶은 거죠. 특히 자기사업 하고 싶고, 오래 안 있을 사람 뽑으려고 해요. 자기 사업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여기 와서 어떤 일을 해도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일할 사람이예요. ‘내가 왜 이런걸 해야 해요’ 묻지 않죠.
그리고. ‘2년이상 회사에 계속 있지 말아라. 있더라도 최소한 다른 포지션으로 성장해야한다’ 라고 말해주죠. 예를 들어 디자이너로 들어왔다면 프로덕트 매니저나 기획자 등 다른 포지션으로 변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여기 와서 성장할거 아니면 들어오지 않는 것이 좋고, 너의 성장에 회사가 못 따라가면 나가라’라고 말해줍니다. 대신에 성장에 대한 긴장을 늦추는 거는 용납하지 않아요. ‘프로젝트를 못 따거나 그런 건 그냥 굶으면 되지만 배우지 못하면 죽는다. 돈 못벌어서 경영진의 압력이 오면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지만 너희들이 성장을 못하는 건 내가 어떻게 못한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롤 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회사 상사에게서 찾아본 적은 없고, 대부분 학자에게서 찾은 거 같아요. 노엄 촘스키도 학자이면서 정치참여도 하고 모든 분야를 섭렵하는 사람이니까. 요즘은 ‘에드거 샤인’이라는 조직문화 구루도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분이예요. 학문적으로 어마어마한 업적도 만들었고 컨설팅 영역에서도 조직을 변화시키는 부분에 큰 역할을 하신 분이죠. 그렇게 평생 연구를 하면서 컨설팅이든 사회적인 어떤 활동을 계속 하는 분. 항상 현장에서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의미에서 ‘에드거 샤인’ 을 롤모델로 삼고 존경해요.
아 그리고 사실은 사랑에 빠진 사람은 오바마에요. 보스톤 있을 때 컨벤션에서 직접 보고 아우라에 미쳐버렸던 기억이 있어요. 남자가 봐도 매력이 넘치죠. 어메이징 그레이스 노래 부를 때도, 오바마 연설 들으면서도 ‘저런 게 정치인이구나. 와 저게 권력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저는 수평적 조직문화, 시스템 맹신하지 않아요. 결국 사람이예요. 그 리더가 뿜어내는 말과 비전이 전부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이야기 하지만 민주주의도 이것을 이끌어 가는 리더에 의해서 만들어 지고 결국 리더의 문제구나 라고 생각 합니다.
나에게 일이란?
나에게 일은 공부죠. 궁금한 것이 많고 공부하지 않으면 삶에서 재미를 못 느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물론 음악, 연극 등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하는데, 와이프는 요즘 이런 이야기를 해요. ‘당신이 요즘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무대 서는 걸 안해서 그렇다. 연애시절에 당신은 1년에 한번은 무대에 섰다’ 제가 학창시절에 색소폰으로 밴드 생활하고, 연극활동도 하고 그랬거든요. 학교 다닐 때는 예술, 음악이 굉장히 하고 싶었어요. 근데 지금은 다 끝났어요. 두아이 키우면서 육아로 30대에 모든걸 다 내려놨죠. 30대가 저의 암흑의 시대입니다. 하하하
퍼포먼스 하는 거 하나, 공부하는 것 이 두 개가 사는 이유 같긴 합니다. 무대에 서는 일이 강연이 될 수 있고 워크샵이 될 수 있고 그런 걸로 푼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글: 최서인@se2nee, 박가을@fall_in_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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